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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인터뷰> 최태민 셋째딸 최순실씨의 독점 고백 - 1994년 우먼센스

by SUNG & SOL 2016.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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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인터뷰> 최태민 셋째딸 최순실씨의 독점 고백 - 1994년 우먼센스

페이스북에 있던 글인데 요즘 기사들이
너무 한쪽으로만 몰아가니 예전 것도
한번 보고 이성적으로 봐 보자는 의미로
옮겨왔습니다.

이 인터뷰는 1994년이니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이 될거란 상상도 힘든
시기였으니 그냥 이런 것도 있구나 하며
봐주시면 될 듯 합니다.


아버지는 모함과 루머에 시달리다 협심증으로 돌아가셨다. 

박근혜씨를 ‘그림자 내조’ 해왔다던 미스터리 인물 최태민씨가 지난 5월 1일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향년 82세였다. 박근혜씨와의 사이에 명쾌하게 해명되지 못한 숱한 소문과 루머만 남긴 채 그는 떠났다. 이제 고인이 된 최태민씨의 입을 통해서는 확증없이 떠돌던 풍문에 대한 확인은 불가능하게 됐다.

기자는 최태민씨의 셋째딸 최순실씨(43세)를 몇차례 찾아갔지만 ‘할 말이 없다’는 말만 듣고 되돌아왔다. 그녀는 ‘아버지에 관한 왜곡된 사실이 있다면 고민의 명예를 위해서도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설득에 어렵게 시간을 내주었다. 지난달 20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으나, ‘심경을 밝힐 글을 준비하고 있으니 시간을 오후 5시로 미뤄달라’는 말을 전해왔다.
그리고 그녀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아버지를 두 번 죽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왔다”며
16절지 6장 분량의 ‘심경 고백서’를 내놓았다. 평범한 얼굴에 안경을 쓴 그녀는 피곤한 기색은 있었지만, 비교적 또박또박하게 곧은 자세로 말을 꺼냈다.
그녀가 준비해 온 글은 감정을 상당히 절제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싸고 또 다시 ‘유쾌하지 못한 과거’들이 들춰지는 것을 그녀는 경계하고 있었다. ‘온당치 못한’ 비난과 모함 속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 아버지의 말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던 세상의 눈초리에 대한 원망도 담겨 있는 듯했다.

최순실씨는 현재 서울 영동에서 9년째 유치원을 경영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투병 중인 마당에 자신이 희망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유치원의 아이들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언론에 보도된다면 틀림없이 학부모들은 어린이들을 퇴원시키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깃들어 있었다. 그럴 경우 어쩌면 유일한 자신의 희망마저 달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터뷰는 일문일답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최씨는 가능한 짧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게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지난 5월 1일 오전 8시 30분 경,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남기신 유언은 없었나요.
“당신을 둘러싼 갖가지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받은 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죽음을 압둔 순간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많이 미안했었다고요... 특히 당신 때문에 어머니가 말못할 고통을 당했다는 점을 가장 회한스럽게 생각했어요.”

-장례식을 알리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알리고 말고 할 게 없잖아요. 그저 평범한게 가족장으로 치렀습니다.”

-박근혜씨에게도 안 알렸나요.
“알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신문보도를 보고 아셨겠지요. 아버님은 90년 육영재단 분규가 생기기 직전 그곳을 나온 후 박이사장(최순실씨는 박근혜씨를 이렇게 불렀다)과 연락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당신 때문에 박이사장이 큰 고통을 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사인은 무엇이었습니까.
“협심증이었어요. 옛날 말로 ‘홧병’이지요. 예전부터 혈압이 높으셨어요. 그런데다 육영재단 분규로 일을 중단하고 집에만 계시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특히 일부 언론이 좀 심하게 아버님을 몰아쳤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홧병이 생겼고...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한몫 했을 거에요. 가족들이 육영재단과 관련된 일을 그만하라고 부탁했지만 듣지 않으셨어요. 특히 제가 많이 말렸지요. 그러다가 좋은 꼴 못 보고 그곳(육영재단)에서 물러났으니 가족들 보기가 민망하셨겠지요. 말씀도 못하고 속으로만 그런 고통을 삭이셨어요. 속병만 키우셨던 셈입니다. 더 사실 수 있었는데...”

최순실씨는 아버지의 사인을 말하면서 무언가 속에서 꿈틀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차마 말 못할 울분 같은 것, 그것은 또 최태민씨와 그 가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던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간간이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곤 했다.
최태민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4개월 동안은 아무 것도 못하고 신병치료에만 전념했다고 밝혔다. 영동 세브란스병원과 순천향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도 하고, 1주일에서 열흘씩 입원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1912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형제가 3~4명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모두 돌아가셨대요. 혼자서 월남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생애는 친척도 없는 쓸쓸한 것이었을 겁니다. 할아버지(최윤성, 90년 독립 유공 훈장 받음)는 독립운동 자금책이었는데,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었답니다.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 때문에 이미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재산이 탕진된 상태였다고 해요. 항간에는 저희 아버님이 일제 때 일본 순사로 근무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부가 훈장을 줬겠어요? 어쨌든 아버지는 월남 후 부산에서 건국대학이라 불리던 건국의숙(후에 동아대학교로 흡수됨)을 마치셨죠. 법과를 전공하셨어요. 공무원이나 회사원은 적성에 맞지 않으셨는지 주로 사업을 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주로 서대문구에 살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지금의 기상대 부근에 정원이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살았는데,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탔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아버지 사업은 꽤 잘 되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청렴하고 정직하게만 살았다고 강변하진 않겠어요. 당신도 인간이니까 보이지 않는 실수를 하셨겠지요. 하지만, 아버지를 둘러싼 각종 모함과 뜬소문이 지나쳐도 보통 지나친 게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돈이나 권력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최태민씨는 현재의 부인(75세)과 피난지인 부산에서 연애결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최씨는 호적이 없었고, 가호적법이 만들어지면서 뒤늦게 혼인신고를 했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재혼이니 어쩌지 하는 소문이 난 것 같다고 측근은 해명했다.

-어머니 건강도 많이 안 좋으신 걸로 아는데...
“어머니도 오래 전부터 신장병을 앓아오셨어요. 한 15년 전쯤부터요. 게다가 최근에는 당뇨증세까지 보여 건강이 많이 악화됐어요. 아버님 살아계실 때만 해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실 정도는 됐어요. 언젠가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갔던 어머니를 보고 의사가 이런 말을 했대요. ‘중환자가 대환자를 모시고 왔군요.’ 그래서 함께 입원하신 적도 있어요. 아버님 사망 후 어머니 체중이 15kg이나 줄었어요. 요즘에는 계단도 못 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당뇨 전문치료기관에서 요양 중이십니다.”

-최순실씨는 박근혜씨를 언제 처음 알았습니까.
“대학 1학년 때인 76년에 처음 봤어요. 그때 흥사단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 참기한 적이 있죠. 직접 만나본 것은 얼마 안 돼요. 계속해서 지켜보았는데 참 깨끗한 여자라는 느낌이 늘었습니다. 흐트러짐이 없고, 욕심도 없어요. 게다가 물러설 줄도 아는 분입니다. 아버님도 같은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와 박근혜씨를 둘러싼 여러 가지 소문들이 무성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끊이지 않고 제기되어 온 의문점들도 많고요.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은 하지 말죠. 마음 같아서는 조목조목 사실을 밝히고 싶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가 당사자도 아니고, 또 자칫 제가 한 말이 박이사장님에게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박 이사장님께서 말씀하신다면 몰라도 제가 말하기엔 아직 때가 이릅니다.”

박근혜씨와 최태민씨 사이의 풍문들을 몇 가지만이라도 확인하려 했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아버지를 둘러싼 과거의 일들이 또다시 들춰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순실씨는 더 이상의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속시원하게 밝히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해달라”며 기자와 헤어졌다.
말은 안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소문의 핵심에 있었던 아버지를 둔 딸로서, 숨죽이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곤혹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건 거론 조차 안되니 이런 것도 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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